고령군은 가야문화의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문화유산 뒤에는, 수천 년 동안 조용히 시간을 이어온 농촌 마을들이 존재한다. 특히 개진면은 낙동강의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전통 농경지로, 그 지명조차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논밭 사이로 이어진 흙길, 어르신들이 직접 쌓은 돌담,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옛 마을 이름들 속에 진짜 ‘한국의 시골’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본문에서는 고령군 개진면의 지리, 지명 유래, 역사적 변천, 전쟁과 산업화의 영향,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통해 마을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조명해 본다.
개진면의 지리적 특성과 자연환경
개진면은 경상북도 고령군 남서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경남 합천군과 맞닿아 있다. 해발 50~150m의 낮은 평야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낙동강 범람원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동안 벼농사와 참외 재배가 이루어져 왔다. 개진면은 안개가 자주 끼는 지역 중 하나로, 특히 새벽의 강가 풍경은 오랜 시간 고요함을 유지해 왔다. 여름이면 개진면의 논은 초록빛으로 물들고,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에 출렁이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정취를 보여준다.
개진’이라는 지명의 유래
‘개진(開進)’이라는 이름은 ‘열어 나아간다’는 뜻으로, 실제로 이 지역은 조선시대 군사적 통로였던 ‘합천진보(陜川津堡)’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동강을 건너는 진입로 역할을 하던 이 지역은 ‘개진나루’라는 이름으로도 불렸고, 조운선이 오가던 시절에는 경상도 내륙과 남해안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로 교차지였다. 《대동지지》에는 “개진은 물길을 따라 열린 남도의 문”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는 그 나루터가 사라졌지만, 지명에 남은 ‘열린 길’의 의미는 여전히 이 마을의 정체성을 설명해 준다.
일제강점기, 수로의 쇠퇴와 마을의 재편
일제강점기에는 낙동강 조운 기능이 사라지면서 개진면은 교통 요충지에서 농업 중심지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이 시기 ‘개포리’, ‘반운리’, ‘직리’ 등의 마을이 행정적으로 통합되거나 분리되었으며, 도로 개설과 함께 강변을 따라 있던 몇몇 마을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였다. 당시 일본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수변 지역에 둑을 설치하며, 강의 흐름을 통제하려 했고, 일부 주민들은 둑 공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지금도 개진면 반운리 근처에는 ‘마장터’라 불리던 옛 장터 터가 남아 있으며, 농산물 집산지로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마을의 변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개진면은 남쪽 전선과 가까운 지역으로서 상당한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군 병력이 개진면 강변에 일시 주둔했고, 일부 마을 주민들은 합천이나 성주 방면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특히 직리 마을은 당시 탄약창고가 설치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공습 위협이 있어 주민들이 ‘개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대피한 사례도 있었다. 지금은 평화로운 들판으로 남아 있지만, 이 마을에는 전쟁의 긴장과 공포가 조용히 깃들어 있다.
지금의 개진면, 그리고 사람들
현재 개진면에는 약 9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60% 이상이 65세 이상의 고령층이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며, 특히 ‘개진 참외’는 인근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매년 4월에는 ‘참외꽃 피는 날 축제’가 열려, 참외 수확 체험과 함께 시골 장터 문화가 재현된다. 면사무소 앞에는 작은 쉼터와 직판장이 있으며,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키운 농산물이 판매되고 있다. 최근에는 귀촌 인구도 일부 늘고 있으며, 폐가를 리모델링한 ‘한옥 게스트하우스’도 운영 중이다.
개진면을 방문하는 방법과 여행 팁
고령읍에서 개진면까지는 차량으로 약 20분이 소요되며, 국도 26호선과 33번 지방도를 따라 진입할 수 있다. 대중교통은 고령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루 3~4회 농어촌버스가 운행되며, ‘개진면사무소’ 또는 ‘개포리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추천 코스로는 낙동강변 산책길, 개진 참외 직판장, 개진 옛길(폐도 구간), 그리고 ‘마장터 옛터 표석’ 등이 있다. 도시의 속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에게는 소박한 여행지가 되어줄 수 있다.
개진면, 낙동강 옆 숨은 마을
개진면은 거대한 유산은 없지만, 그 속에는 작고 단단한 삶의 흔적이 살아 있다. 사람들은 떠나고, 길은 사라졌지만, 마을의 돌담과 들길, 그리고 낙동강의 흐름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이런 마을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이유는, 결국 한국이라는 땅이 단지 수도와 도시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닫기 위해서다. 개진면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장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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